음악이야기

LED ZEPPELIN - History (1996년 8월)

뮤즈커피 2012. 7. 15. 23:42

                                                                       

 Led Zeppelin- 나에겐 특별한 의미의 밴드.. 고1때 처음 그들의 음악에 빠져들면서 Rock의 세계에 푹 빠져버렸다.

지금까지 LP,CD, 뮤직비디오 그들과 관련된건 모두 수집했다.. 내 아이디 zinizepzep은 Led Zeppelin을 의미한다.

컴퓨터 파일을 정리하다 96년 하이텔 음악동호회 사이트에 올렸던 글이 남아있어서 블로그에 남겨본다.. 여기저기 잡지에 나온 글을 짜집기한거 같은데.. 그래두 많이들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L E D    Z E P P E L I N

                                                                                  

                                                                                               Vocal - Robert Plant

Guitar - Jimmy Page

Bass & Keyboard - John Paul Jones

Drum - John Bonham

 

비행선 제플린호의 발명자인 훼르디난도 본 제플린백작은 독일 남부의 바딘 베르그 출신으로 한때 광식적인 애국주의 사상을 지닌 귀족이었으며, 1870년 8월에 스페인의 왕위계승 문제를 계기로 일어난 독불전쟁에 육군 장교로 참가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제플린호가 쓰여지기 시작 한 것은 1915년 1월 9일 가이더 황제가 영국본토 공습을 결행토록 명령한데서 부터이다. 최초의 런던 공습은 동년 3월 31일에 시작되었으며, 1915년 한해동안 총 20회의 공습을 통해 37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74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었다. 1915년 10월 13일 죠이무 브레이사브트 대위가 조종한 L-15형 제플린호가 런던의 중심부에 있는 리시움극장에 폭탄을 투하하여 극장을 잿더미로 만들은지 정확히 54년 후인 1969년,복관된 리시움 극장에서 적군의 비행선이었던 "LED ZEPPELIN"이란 그룹이름으로 데뷔한 이들이 비틀즈의 영광을 이어받아 대영제국의 음악사절로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아오고 있는 것이다..

 

1944년 1월 9일 미들섹스 지방의 헤스톤에서 노무 관리자인 아버지 제임스와의사 비서인  어머니 패트리셔의 외아들로 태어난 JIMMY PAGE의 본명은 JAMES PATRICK PAGE이다.

1948년 8월20일 스태포드셔의 브롬위치 에서 앤지니어인 아버지 로버트와 어머니 앤 사이에서 태어난 "ROBERT ANTHONY PLANT" (로버트 플랜트의 본명),

1946년 1월 3일 사드쓼에서 뮤지컬스타인 어머니와 피아니스트인 아버지사이에서 태어난 "JOHN BOLDWIN"(JOHN PAUL JONES의 본명)

1948년 5월 31일 웨체스터셔의 레디치에서 엔지니어인 아버지 잭과 어머니 조안나 사이에서 태어난 "JOHN HENRY BONHAM"(JOHN BONHAM)

등 LED ZEPPELIN의 탑승자로 명명되어진 운명의 사나이들.......

 

레드 제플린의 역사는 영국의 전설적인 리듬 앤 블루스 그룹YARDBIRDS의 해체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지미 페이지는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다. 레드 제플린을 이끌어간 강력한 리더십과 레드 제플린의 힘있는 사운드는 그의 무서운 카리스마를 입증하고도 남는다.그는 또한 신비주의자이기도 했다. 평소 새까만 양복에 새까만 낵타이를 선호하던 그의 취미는 신비주의적인 체취를 더욱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는 야드버즈에 참가하기 이전에 이미 톱세션맨으로서의 영광을 누린 바 있었다.코리돈의 미술학도 시절에는 릭키 넬슨의 레코드에 실린 제임스 버튼의 솔로와 앨비스 프레슬리의 초기 작품에 등장하는 스코티무어의 인상적인 연주를 모방하여 기타 솜씨를 익혔다..

그의 인생 초기에 페이지는 행려병과 선열로 인한 약한 체력 때문에 순회공연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신 그는 세션에 관심을 돌려 당시 최고의 연주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연주를 잘 나타내주는것으로 the WHO-"I CAN'T EXPLAIN","MY GENERATION" 그리고 JEFF BECK의 "BOLERO"등 수많은 작품들에서 그의 초창기 화려했던 모습을 접할 수가 있다

 

페이지와 존스는 제플린결성 전부터 이미 손꼽히는 세션맨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는데 특히 도노반의 반주를 맡게 되면서 둘사이는 가까워 지기 시작했다. 뜻한바 있어 페이지는 최후의 야드버즈를 지휘하게 되고 야드버즈 해체 후 존즈와 함께 그룹결성을 구체화 시키기 시작, 우선 band of joy라는 그룹에서 활동하던 금세기 최고의 보컬리스트 로버트 플랜트를 맞이하게 되며 플랜트의 친우인 존 본햄을 맞아들이는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들은 그룹이름을 NEW YARDBIRDS라 칭하고 리허설에 들어갔는데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그룹 WHO의 멤버들과 담소를 나누던중 LED ZEPPELIN이란 아이디어가 거론이 되어 그룹 이름을 바꾸게 된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들의 성공은 시간문제라고 내다봤으며 ATLANTIC레이블의 거물 제리 웩슬러는 제플린에게 당시 최고의 계약금인 20만불(약 1억 6천만원)을 선뜻 지불하는 선견지명을 보이기도 했다.

잠시 여기에서 빼먹은 인물이 있다. 흔히 5번째의 멤버로 불리우는 매니저 피터 그랜트가 바로 그사람이다.피터 그랜트는 판금 기술자, 무대장치 기사, 프로 레슬러, 대역배우 등의 다양한 직업을 거친 사람이었다. 그가 뮤직 비즈니스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것은 저 유명한 소호 클럽에서 아이스 코피 바에 경비원으로 취직하면서부터 였다. 소호 클럽에서 얼마 동안 뮤직신의 생태를 파악한 그는 당시 인기 뮤지션들의 투어매니저가 되어 본격적인 쇼 비지니스맨으로 뛰기 시작했다. 얼마 뒤에는 앨런 프라이스 콤보와 내시빌 틴즈의 매니저로 활약, 영국의 뮤직 비지니스맨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구축했다. 레드 제플린의 매니저가 된 이후에는 수완좋은 재산관리인 겸 대부와 같은 역활을 하면서 비극적 전설의 매니저가 되었다. 처음에 레드 제플린은 런던 일대의 클럽을 무대로 조그만 활동을 벌였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엔 시기가 아직 일렀던 것이다. 그러자 영국에서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한 레드 제플린은 미국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1968년 말엽 대망의 데뷔 앨범'LED ZEPPELIN Ⅰ'이 발표되자 레드제플린은 미국 내에서 강력한 존재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앨범은 블루스에 기초를 둔 헤비 사운드로 이 앨범 한장만 으로도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으며 야드버즈의 영광을 걸머지고 출발한 이들에게 무관심했던 영국의 비평가들도 제플린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1969년에 발표된 2집앨범은 1집의 음악방향과 큰차이는 없었다. 이 앨범 중 'WHOLE LOTTA LOVE'는 1969년 톱-5 히트를 기록했다. 이로서 레드제플린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전세계 록 팬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게 되었다.


 

1970년 봄에 녹음되어 여름에 발표된 3집앨범은 Visual디자인으로 유명한 Zacon Company의 화려한 아트 워크로 등장하여 미국과 영국의 앨범차트를 동시에 석권했던 베스트셀러로 앞서의 두앨범과는 다른 음악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블루스적인 내음이 상당히 줄어들고 좀 더 다양한 음악적인 시도들이 돋보였다. 여기에 수록된'Immigrant Song'은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미묘한 방향전환이 시도된 작품으로써 보다 세미 어쿠스틱하고 민요풍에 근원을 둔 작품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4집 앨범에서 더욱 세련미를 보이게 된다. 이 1971년도 앨범은 히피의 신비주의와 신화적인 것에의 집착이 강하고, 전자보다 파워가 있는 성공적인 작품이었다.

여기에 수록된 서사시적인 'Stairway To Heaven'은 이러한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제플린의 수작이었다. 당시 아메리카는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1973년의 이들의 미국 여행은 갑작스런 인기를 불러모았다. 이는 비틀즈가 세운 기록을 산산조각내는 대단한 흥행이었다.

예를 들면 플로리다의 템파에서는 제플린을 보기 위하여 5만 6천명의 관객이 31만 8천달러를 내놓는 경이적인 사태가 벌어졌다.이 미국 공연 전체를 통해 제플린은 3백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1973년말 피터 그랜트가 런던의 파이낸셜 타임즈에 밝힌 바에 따르면 제플린은 전세계를 돌며 벌인 순회공연과 콘서트에서 1973년도에만 3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고 했다.

'Stairway To Heaven'이 담겼던 전작으로부터 햇수로 2년만에 이 그룹이 만들어 낸 작품 중 가장 다양한 오리지널 컬랙션인 'Houses Of The Holy'가 1973년 발표되었다. 이 앨범에선 보넴의 대나무 자르는 듯한 드러밍과 페이지의 투명한 테크닉,플랜트의 다소 섹스 어필한 묘한 매력을 풍기는 연가 "D'yer Maker"을 히트시키며 단숨에 골드레코드를 기록했다. 5집까지 전앨범이 골드를 기록하자 소속 레이블인 ATCO 레코드에서는 이들에게 인도에서 휴양을 즐기도록 배려해준다. 플랜트의 아내인 모린이 인도계 영국인이기 때문에 평소 제플린의 멤버들은 그녀에 의해 인도의 신비가 사로잡고 있었으며 해서 휴양지를 인도로 택했던 것이다. 바로 이때 이들은 쉬지않고 동양의 신비의 문명에서 얻은 인스피레이션으로 대작 "PHYSICAL GRAFFITI"를 더블앨범으로 완성 75년에 선보이게 되는데 MIKE DOUD, PETER CORRISTON, ELLIOT ERWITT,MAURICE TATE, DAVE HEFFERNAN등 뉴욕과 런던에서 명성을 휘날리는 에이스 그래픽디자이너 5인을 동원하여 초호화 자켓으로 등장 순식간에 플래티넘 레코드를 획득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이 앨범의 압권은 러닝타임 9분41초의 서사시"Kashmir"와 11분8초의 대곡 "In my time of dying"이라고 할수 있으며 지미의 와우와우 후레이즈가 완벽하고 보냄의 썬더드러밍과 플랜트의 절묘한 보컬 및 하모니가 일품인"Custard pie",얄미우리만치 고운 앙상블로 시작되어 격렬한 순간을 지나 다시 곱게 마무리지어지는 앨범에 숨겨진 비장의 카드 "Down by the seaside"는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넘버이다. 6집 "PHYSICAL GRAFFITI"가 갖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크다. 우선 ATLANTIC레이블에서 제플린의 독립레이블인 "SWAN SONG"으로 발매가 되었다는 점과 최초의 더블 앨범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렇다할 히트곡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빠른 속도로 플래티넘을 획득했다는 사실등이 명실공히 헤비사운드의 제왕임을 입증해주고 있었다


 

1975년 "피지컬 그레피티"의 발매기념 전미 순회공연에서는 물경 500만불(40억원)의 수익금을 올렸는데 제플린이 가는곳에서 무엇이든 최고의 기록이 수립되었던 마이다스의 시절이었다.

1976년 그들의 7번째 앨범" PRESENCE"가 발표된다. 이앨범은 "Tea For one" 의 블루스 연주를 빼고는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하드록으로 연주가 되었다. 7집 앨범을 녹음하기전에 로버트 플랜트는 아내 모린과 함께 그리스의 섬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 차를 타고 가다 충돌, 심한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서서히 그리고 끈기있게 부상을 극복,건강을 회복할 수가 있었고 말하자면 " presence" 는 로버트 플랜트가 투병중에 휠체어에 앉아 취입했던 작품이다. 이런 점애서 이앨범은 더욱 의의가 있는 작품이었다. 이어서 같은해에 그들의 8번째 앨범인 "THE SONG REMAINS THE SAME"이 발표되었다.이 앨범은 원래 1973년 7월27일 부터 29일 까지 3일간 뉴욕의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렸던 제플린 최고의 콘서트라고 평가받았던 실황을 그들의 사생활을 가미시켜 제작한 기록영화 "THE SONG REMAINS THE SAME" 이 76년에 공개되면서 음반도 같이 등장했던 것이다. 당시의 공연을 가리켜 번뜩이는 필봉을 자랑하는 팝 컬럼니스트 데이빗 후리크는 이렇게 말했다.

 

"내 생애 최고의 감동속에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던 3시간의 드라마였다"


 

영국 최고의 디자인 팀인 "Hippnosis and Hardie"(핑크 플로이드의 자켓도 이들이 담당)의 뛰어난 아트 워크로 등장한 이앨범의 압권은 26분 53초의 진수 "Dazed and Confused"인데 이곡에서의 영웅은 지미 페이지이다. 지미는 여기에서 바이얼린의 활로 깁슨 레스폴 기타와 마샬 앰프의 충격적인 컴비네이션을 구사하여 듣는이를 완전히 사로잡는 마력을 뿜어낸다.'Moby dick"과 "stairway to heaven"등이 장시간의 러닝타임을 통해 라이브의 진수를 만끽하게 해주고 있다.특히 이앨범은 재즈의 생명인 즉흥연주의 매력으로 전율을 더해주고 있다. ....

 

1977년 오클랜드에서의 공연직후 로버트에게 예기치 않았던 비보가 날아들었다. 5살된 아들 Clarke가 전염병을 앓아 중태에 빠졌는데 이미 손을 쓰기에 늦었다는 소식이었다. 7월 26일의 일이었다. 로버트는 즉각 영국으로 날아갔다. 부인 모린은 너무도 큰 충격에 의식을 잃고 있었다 .

7월 28일 목요일자 daily express지는 1면 머리기사로 "록계의 억만장자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다"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었다. 미국 연주여행을 마지막 10일 남겨놓고 뉴올리언즈에 체제하고 있던 로버트는 부인 모린의 국제전화를 받고 아들의 비보를 전해 들었다.

이 일로 제플린의 연주여행의 스케줄은 결국 취소되고 말았고 제플린의 활동이 장기간 중지되기에 이르렀다. 항간에는 제플린의 해산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정말 그룹이 헤체할 것만 같이 보였지만 1979년 그들의 9번째 앨범"IN THROUGH THE OUT DOOR"를 발표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예약 주문 판매만도 170만장이나 되었다는 화재의 새 앨범은 제플린의 팬들에겐 더 없이 반가운 선물이었다. 170만 장이 예약 주문판매로 팔렸는데 앨범 한장이 보통 9달러에 팔리니까 170만장이면 한화로 76억5천만원 정도로 계산된다. 한 아티스트나 그룹의 주문 판매에 의한 기록으로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고 76년 이후 침묵을 지켜온 이들에 대한 팬들의 그리움을 숫자로 매기긴 어색하지만 팝 전문지인 빌보드비 앨범 챠트에 발매 4일 만에 1위를 차지했다고 하는 것은 아무 말도 나오지 않게 만든다.


 

1980년 9월 25일, 레드 제플린의 드러머 존 보냄이 지미 페이지의 저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첫번째 검시 결과 사망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자살설은 당초부터 부정되었다. 무언가의 원인에 의한 자연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이었다. 이어서 행해진 검시 해부에서도 확정 적인 사인은 가려지지 않았다. 10월 8일자 데일리 익스프레스지는 알렉스 헨드리가 정리한 기사를 게제했다. 그에 의하면 존의 사인은 지나친 알콜섭취라는 것이었다. 존 보냄은 사망 직전까지 계속 12시간이상 보드카 오렌지를 마셨던 것이다.그 결과 그의 혈액 속에는 알콜성분이 통상의 3.5배까지 달했던 것이다. 병리학자 에드몬드 헴스테드 박사는 버크셔의 윈저에서 열린 검시 법정에 나와 배심원들에게 존은 음주 결과 기분이 나빠졌든가 숙취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눈을 뜬 그대로 질식사했다고 소견을 이야기했다. 또 존의 운전사였던 렉스 킹은 사망 전날의 존의 행동을 증언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운명의 술파티는 9월 24일 점심때 히어포드에 있는 존의 자택 부근의 선술집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존은 거기서 통상보다 4배나 진한 보트카 오렌지를 4,5잔 마신 후 리허설에 참가하기 위하여 윈저로 향했다. 리허설 스튜디로에서도 다시 폭음했던 존은 지미의 집을 찾아가 다시 진하게 만든 보트카오렌지를 시간당 2, 3잔의 속도로 계속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소파 위에서 잠들었다가 지미에 의해 침대로 옮겨진 후 사망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비극은 제플린의 장래에 대해서 여러가지 억측을 낳았다. 한편 각 매스컴은 그의 보도를 크게 실었다. 맬로디 메이커에서는 록의 커다란 별 하나가 졌다고 애도했고 레코드 미러지에서는 존 본넴은 결코 잔재주를 피우는 뮤지션이 아니었다고 애도했다. 롤링 스톤즈지는 존 본냄은 놀랄만한 재능을 가졌던 다시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존 본냄의 장래식은 보냄의 농장근처의 작은 교회에서 있었다. 제플린과 고인의 가족들은 보냄의 장례식을 극비리에 갖기로 했다. 그리하여 10월 10일 금요일 오전에 장래식이 있었는데 하늘도 슬펐던지 비가 내렸고 장레식을 알고 찾아온 팬은 겨우 8명 뿐이었다. 영국의 일간지들은 존보냄이 죽은 뒤 제플린이 해산할 것 같다고 보도했다. 그런가 하면 또 며칠 뒤에는 새로운 존의 후임자가 곧 발표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12월 4일 목요일 레드 재플린은 유명 신문에 다음과 같이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다정했던 친구의 죽음에 즈음해서 고인의 가족에 깊은 애도의 뜻을 밝힘과 동시에 우리와 그리고 매니저들이 지니고 있던 화목함과 연대감을 다시 확인하면서 더이상 활동을 계속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팬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존 보냄은 영국을 대표하는 드러머였다. 그가 없었다면 제플린의 초기의 성공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드럼은 지미 페이지의 기타플레이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의 드러밍을 보면 누구나 흥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는 평소 맥주를 즐겨 마셨다. 그러나 취할 정도로 마시는 날은 거의 없었다. 그에게 혹시 언짢은 일이 있다면 그는 술을 마시는 대신 드럼을 두들겼다. 그런데 불행중 다행으로 그가 죽은 뒤, 그의 죽음을 장사로 이용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존레논, 앨비스프레슬리, 지미 핸드릭스, 마크 볼란, 브라이언 존스 등은 그들이 죽은 뒤 재산 다툼과 그들의 죽음에 편승한 "상혼"이 고개를 쳐들었는데 존 보냄이 죽은 뒤에는 그런 저열한 추태는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1980년 12월 뉴욕 자택앞에서 존 레논이 사살된 이래 제플린의 멤버들은 제각기 신변보호에 호신책 때문에 재플린 멤버들의 뒷소식은 잘알려지지 않았다. 존 레논의 사건을 계기로 살아남은 제플린 멤버들의 사생활은 짙은 베일에 싸이게 된 것이었다.

 

제플린은 12년 동안 (1969~1980)유일한 톱 텐 진출곡이자 유일한 골드싱글인 "whole lotta love"를 남겼으나, 9연속 골드 앨범이라는 불후의 기록을 안은 채 맴버들의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섰다.이후 플랜트는 "PICTURES AT ELEVEN","PRINCIPLE OF MOMENTS","SHAKEN 'N' STIRRED"등 의 일련의 솔로앨범들을 크게 성공시켰으며, 페이지는 제플린의 미공개 트랙들을 모아 보냄의 추모 음반으로 "CODA"를 공개했다. 1982년 발매된 이 앨범의 타이틀인 CODA는 모든 예술에 있어서 종결부를 뜻하는 것으로 이제는 더이상 출반될 수 없는 마지막 앨범이라는 추측이 팬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또한 페이지는 찰슨 브론슨이 주연한 영화 "DEAD WISH II"의 영화 음악을 맡기도 했고 플랜트와 의기투합한 그룹 허니드리퍼즈를 시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로이 하퍼와의 조인트 앨범 "WHATEVER HAPPENED TO JUGULA"그리고 1983년 배드 컴퍼니의 보컬이었던 PAUL ROGERS와 그룹 FIRM을 결성 첫앨범 "FIRM", 2집"MEAN BUSINESS"를 출반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지만 얼마 안있어 헤체하였다. 비평가들은 지미의 기타는 한물 간 것이라는 혹평을 하였다. Live Aid 에서 플랜트는 인터뷰에서 "지미 페이지는 이제 옛날의 그가 아니다"라는 발언을 했다

이런 기사가 나간뒤 마치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지미는 참여하는 콘서트마다 위태위태한 연주를 보였으며 록계에서는 그의 이름앞에 "한물 간"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수식어를 달았다.

 

재플린의 신화를 소중히 하는 사람들은 그의 실수로 우상화하던 그룹이 역사속에 묻힐까 두려워텖고 의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젊었을때 그렇게 정열을 다 쏟아부었으니 당연한 일이다"라고 자연의 법칙을 인용하며 끄덕였고 또 역학에 밝은 일군의 무리들은 "고목나무에 꽃피는 법은 없다"며 당연한 귀결로 단정지었다. 그러나 1990년 도닝턴의 에어로스미스무대에 나타난 지미는 자신을 싸고도는 불쾌한 소문을 일시에 날려버리는 명쾌한 연주를 보였다. 그 후 페이지는"LED ZEPPELIN CLASSICS"의 리마스터 앨범을 내놓았으며 1993년 지미 페이지는, DEEP PURPLE과 WHITE-SNAKES를 이끌었던 보컬리스트 DAVID COVERDALE과 의기투합하여"COVERDALE PAGE"란 앨범을 발표하며 록계의 신화적인 존재로서 다시 음악에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존 폴 존스는 제플린 해산 후 거의 활동을 안하다가 LIVE AID에서 잠시 모습을 비췄다가 1985년 "SCREAM FOR HELP"란 영화의 음악을 맡아서 또 한번 모습을 나타냈다. 이 앨범엔 지미 페이지가 기타를 맡아 존스와 연주를 했고 특히 제플린 시절엔 거의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없었지만 이 앨범엔 JOHN PAUL JONES의 보컬 실력을 들을 수가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음악 후엔 거의 활동이 뜸하다.

제가 이글을 올리기 몇일전에 어메리카 뮤직어워드에서 지미와 로버트 그리고 존 폴 존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지미와 로버트는 작년에 재결합 레드 제플린호를 다시 이룩시켰으며 존은 지난해 영화음악을 맡았으며 또한 여러 아티스트들의 셰션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특히 지미와 로버트는" Black Dog"을 연주하여 나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었다.


 

LED ZEPPELIN

부와 명성 그리고 화려한 인기를 목표로 한 위선적인 테크니션으로서가 아니라 음악 속에 살아 있는 순수한 정열을 바탕으로,진실된 인간애로 뭉쳐졌던 제플린.

그들은 진정한 뮤지션의 자세가 무엇이며 ,미래의 대중을 이끌어갈 사운드가 어떤 것인가를 제시했던 완벽한 그룹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또한 광란하는 차원으로 매도당해 오던 록 뮤직을 감상하는 차원으로 승화시킨 커다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더우기 대중음악을 버려진 휴지조각처럼 취급해왔던 이 땅에서도 발표된 지 23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stairway to heaven"은 수 많은 록 팬들의 가슴 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현세에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미스터리인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을 제플린의 예지를 통해 오르고픈 인류의 염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리라.


 

                          by zinizep

T H E        E N D


* Epilog

연못 앞에서 슬피 울고 있는 지미 페이지에게 산신령이 나타나 물었다.

"왜 그리 슬피 울고 있는고?" 옷소매로 급히 눈물을 닦은 지미는 보컬리스트를 빠뜨렸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산신령은 로버트 플랜트를 데리고 와 물었다. "이 사람이 네 보컬리스트냐?" 지미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다시 사라진 산신령은 잠시 후 폴 로저스를 데려왔다. "그럼 이 남자가 네 싱어냐?" 이번에도 지미의 대답은 NO. 그러자 산신령은 데이빗 커버데일과 함께 나타났다.찾고있던 보컬리스트를 얻은 지미는 매우 기뻐하며 데이빗과 함께 COVERDALE PAGE를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재작년도 어느 잡지에서 커버데일과 지미 페이지의 앨범발표 소개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물론 이야기는 거짓으로 꾸며낸 애기다. 지금 지미 페이지는 커버데일과의 조인트를 청산하고 제플린의 죽마고우 로버트 플랜트와 재결합, LED ZEPPELIN 호의 새로운 비행에 들어갔다. 아쉬운건 존 폴 존스가 빠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산된지 15년만에 재결합된 제플린, 앞으로 이들의 화려한 재기가 성공을 하길 빌며 LED ZEPPELIN의 글을 끝맺겠읍니다.여러가지 잡지와 레코드 해설지,그리고 제플린의 일대기에 관한 책들을 참조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좀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많았읍니다만 끝까지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1996년 8월 씀